2002년 4월 26일. 이 날 한전 신안성변전소에서는 동양 최초로 765kV 시대의 개막을 세계에 우렁차게 알리는 765kV 가압행사가 있었다.

1993년 9월 첫 삽을 뜬 이후 무려 11년 동안 참으로 험난한 길을 걸어온 전력인들의 땀과 열정으로 만들어낸 결정체였고, 100여년을 이어온 대한민국 전력사(史)에 있어 가장 큰 획을 긋는 위대한 장면이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2003년 6월 18일 765kV급 2회선 송전선로에 대한 1회선 휴전 작업을 성공적으로 끝마침으로서 세계 최초로 765kV 2회선 송전선로 운용 시대를 열었다.

그리고 2007년 12월 현재. 상업운전 이후 한전은 5년간 훌륭하게 765kV를 운영해 왔고, 명실상부한 초고압 선진 국가로 우뚝 서 그 위용을 세계 각국에 떨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뚝딱 이뤄진 것은 절대 아니다. 이 거대 사업에 참여했던 모든 전력인들의 피나는 노력이 없었으면 한낱 ‘꿈’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765kV 사업은 그 중요함 만큼이나 많은 부분이 정리돼 있으나 연도별 시행사항을 조목별로 정리해 보는 것도 매우 뜻 깊은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본지에서는 한전을 세계 최고의 기술 회사로 우뚝 서게 만든 765kV 사업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상기시키는 차원에서 1992년 초대 송변전처 송전전압격상추진반장을 지낸 한엽 前 한전 처장의 기고를 10회에 걸쳐 연재, 그 의미를 독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한다.

한엽 前 처장은 서울대학교 전기공학과를 졸업, 1965년 한전에 입사한 후 송변전처 송변전관리과장, 남서울전력관리본부 영서변전소장, 초고압건설본부 기술부장, 창원전력관리처 부처장 등을 역임하고, 1992년부터 1996년까지 초대 송전전압격상추진반장, 이어 1998년까지 765kV건설처장을 맡으며 우리나라가 765kV 시대를 성공적으로 여는데 있어 가장 큰 공헌을 한 인물이다.

이러한 과정을 겪었기에 그의 글에는 사업 추진에 있어 어려웠던 점에서부터 어떤 인물들이 이 난관을 헤쳐 나갔는지, 또 일을 추진하면서 겪었던 에피소드 등이 연도별로 자세하게 적혀 있다. 특히 당시 사업을 추진했던 이들이 건설사업의 성공을 위해 얼마나 많은 고민과 노력을 했는지 등 담당했던 이들이 아니면 잘 모르는 이야기들이 흥미진진하게 이어진다.
무엇보다 현재 추진 중인 765kV 신고리~북경남 송전선로 및 765kV 북경남변전소 건설사업이 민원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본 기고문의 내용은 765kV 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이들은 물론, 일반인들의 마음속에도 765kV 사업의 의의를 되새기게 하는데 많은 도움을 줄 것으로 보인다.

1992년 6월 1일. 나는 한전 창원전력관리처 부처장 직위에서 한전의 800kV 사업 추진을 위해 신설된 격상사업추진반의 반장으로 임명받았다.

800kV 사업은 2000년대 우리나라 전력사업을 위해서는 불가피한 최고 시스템 전력 격상 사업이다. 지금까지는 345kV가 가장 높은 계통전압이나 2000년대 초 전력수요가 5000만kW 수준으로 늘어나고 지역간 융통전력이 1000만kW 정도로 늘어나면 계통전압의 격상이 불가피하다.

창원전력관리처 부처장으로 일한지 꼭 1년만의 일이었으나 나는 기쁨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이 조직은 새로이 신설되었기 때문에 예하 인원도 아직 충원이 안 되었고, 방도 책상도 없는 달랑 나만의 발령이었다.

내가 이 신설된 조직의 장으로 임명될 것이라는 귀띔도 받았고 솔직히 시골 생활 1년만의 서울 가족과의 면회에다 새롭고 거대한 사업을 수행함에 따른 기대 또한 없지 않아 오고 싶은 생각도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막상 발령을 받고 보니 왜 내가 어렵고도 중차대한 자리를 덜렁 받았는지 정말 막막하기만 할 뿐이었다.

꿈에도 그리던 2직급 승격으로 남단에 위치한 창원전력관리처 부처장으로 발령 받을 때는 기쁨뿐이었다. 서울에서 너무 멀어 주로 비행기를 이용해야 하는 불편이 있긴 하였지만 시골 인심도 좋고 설비도 대체적으로 깨끗하고 부하사정도 그렇게 급박하지도 않아 정말 부처장으로 지내기에는 좋은 곳이었다.

처장으로 같이 발령 받은 박태수 氏도 좋으신 분이고, 노조위원장 등 간부, 직원들도 좋은 분들이 많아서 더더욱 좋았다.

서울과 너무 멀어 가족과 만나는 것이 한달에 1~2번 밖에 되지 않아 좀 서운했지만 2주 꼴로 한번씩 만나면 연애하는 기분까지 들어 마냥 싫지만은 않았다.

어쨌거나 서울지역 관리처 부처장 정도로 부임 되었으면 아주 좋았으련만 신설 직위인데다, 거대하고 중요한 사업의 추진 책임자로 임명되었으니 솔직히 기쁨은 하나도 없고 걱정이 앞섬은 어쩔 수 없었다.

다행히 부장급으로 송전, 변전 담당부장 두 자리가 있었는데 송전 담당으로 나와 인연이 많았던 구본묵 부장이 자원하였고, 변전 담당은 역시 이영식 부장이 자원하여 안심이 되었다.

왜냐하면 아무래도 사업은 1차적으로 송전 분야가 우선 될 것이므로 아카데믹(academic)한 구본묵 부장이 적임으로 생각되었고, 또한 신설 부서인 만큼 사내 협의 관계 등의 예산, 조직 등 일이 많을 것이므로 사교적인 이영식 부장과 같이 일 할 수 있어 만족 할 수 있었다.

그 아래 과장급 4명, 직원급 4명을 충원해야 하는데 일부 희망자가 있긴 하였지만 신설부서에다 어려운 사업을 수행해야 하는 부서라 솔직히 인기가 별로 없어 충원이 쉽지가 않았다. 그렇다고 아무나 발령 낼 수도 없고, 본인이 희망하더라도 자질이 안 되는 사람은 또 곤란하였다.

그래서 가급적 참신하고 기본 자질만 있으면 본인의 희망을 중시하여 선발, 4직급 4명과 직원 4명을 충원하였는데 역시 모든 것은 본인의 의욕이 중요함을 깨달았고 모든 사람은 기본 자질만 있으면 개개인의 장점을 잘 살려 나갈 때 훌륭히 일할 수 있음도 알았다.

그 뒤 새로운 사업을 위한 기술 검토와 계획 수립에 참신하고 새로움에 도전하는 일꾼들에 힘입은바 컸다. 나 자신 솔직히 800kV 시스템에 대한 기본적 실력이 빈약하였으나 그 후 두 부장과 과장들을 중심으로 한 기술적 연구 검토로 크게 발전될 있었음도 모두 이에서 비롯되었다.

여기서 반드시 이야기 해 둘 것은 그간 기술연구원을 중심으로 몇 년간 800kV 시스템에 대한 기술적 연구가 있었고, 고창 실증시험장 건립을 이미 추진 중에 있어 이의 활용이 사업추진에 많은 도움이 되었음이다. 두 부장 또한 1979년을 전후해 미국에서 800kV 시스템에 대한 기술 후년을 받은 바 있었기에 기본적으로 출발선은 황무지 그 자체는 아니었다. 

저작권자 © 한국전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