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여년 전 일본에서 ‘열쇠’라는 소설이 나와 중년 주부들에게 충격을 준 적이 있었다.

그 내용을 간단히 설명하자면, 좀 많이 배웠다는 한 교수 부인이 자기 남편에게도 결혼생활 20년이 넘도록 자신의 나체를 보이지 않고 살았는데 ‘성교’가 싫어서가 아니라 자존심과 체면 때문이었다.

때문에 ‘성교’에서 절정을 맛보기는 매우 어려웠다. 그러나 남편이 죽은 후 그 욕구를 참지 못해 욕실에서 목욕을 하다가 자연스럽게 기절한 척 하면서 사위에게 나체를 보여 결국엔 사위와 딸과 함께 동거하는 변태적 생활을 하는 내용이다.

이 소설은 일기형식으로 기술했지만 당시 일본사회에서는 매우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너무 오래된 일이라 내용이 맞을지는 모르나 대략 이런 것이었다.

사실 부부간의 자존심, 다시 말해, ‘사랑놀이’에서 남편이나 아내가 자존심 때문에 몸을 사리거나 부끄러움을 탄다면 그 부인은 성교에서 오르가슴은 커녕 흥분도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체면을 차리니 자극적인 희한한 자세를 취하지도 않을 것이고 그 남편이 ‘항문’은 말할 것도 없고 ‘옹달샘’ 조차도 애무하거나 빨지를 못하게 할 터이니 말이다.

그 남편들도 체면 때문에 기본적인 형태의 ‘성교’만 고집한다면 여성에게 만족을 주는 것은 포기해야만 할 것이다.

실제 못 배운 부부들보다는 많이 배운 부부들 사이에 자존심과 체면을 중히 여기는 사례가 많아 우습게도 지식층 중에서 ‘불감증’ 여성들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다고 한다. 참으로 아이러니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사실이 그러하니 어찌하겠는가. 부부간에도 그놈의 자존심 때문에 중년이 넘었어도 남편이 옆에 오는 것이 두렵고 팬티를 벗기는 것이 불안하니 말이다.

사실 부부는 ‘일체’라고 말한다. 그것은 마음만이 아니라 ‘육체’ 또한 하나가 된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하나가 되어야 할 부부가 체면이나 자존심 때문에 남편이나 아내 앞에서 두 다리를 크게 벌리고 가장 아름다운 ‘곳’을 보여주기를 꺼려한다면 그것은 분명 ‘일체’가 아닌 것이다.

때문에 진정한 부부라면 ‘성교’를 할 때 최선을 다하면서 상대에게 모든 것을 보여주고 만지거나 빨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 ‘사랑놀이’이고 ‘절정’으로 향하는 지름길인 것이다.

물론 체면을 차려야 할 경우도 많이 있다. 즉, ‘생리’ 중이라던가 불가피한 일 때문에 ‘옹달샘’을 씻지 않았는데 남편이 그곳을 빨려고 한다면 거부할 수도 있고 자식들 앞에서도 자존심을 차릴 수가 있다.

그러나 밤잠자리 속에서의 남편에 대한 자존심이나 체면은 분명 ‘불감증’의 원인이 되고 상대를 불편하게 만드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이제 부부라면 상대에 대해 자존심을 세우는 행동은 삼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특히 ‘성교’ 중에서만은 내 모든 것을 상대에게 다 준다는 생각으로 애무를 하고 사랑놀이를 해야만 오르가슴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만 할 것이다.

‘성교’에서의 ‘백미’는 함께 절정을 맛보는 것이고 화희를 느끼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분명 삶의 원동력이 되고 생활의 활력소가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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