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닥다리 카메라… 거기엔 사람이 있다’

디지털 시대가 막연하게 예고된 아주 오래 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디지털의 매력을 찬미해왔지만, 역시 사람이 온전하게 디지털에 동화되기는 어려운 법이다.

전자문화가 발전해 가면 갈수록 그 안에 담아낼 수 없어 갈 곳을 잃은 많은 ‘인간적인’ 것들이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정확하고 차가운 디지털의 이미지에서 따뜻한 인간미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인간성이 개입될 여지가 보다 많은 ‘옛날 것’들에 강한 애착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이 기계와 문명을 넘어선 ‘무위자연’으로의 회귀를 그리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아날로그를 넘어서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이라, ‘아날로그 기계’만으로도 이들에게 따뜻한 감성을 불어넣기에 충분한 탓일까.


KGB에서 첩보용으로 제작, 터널효과로 수많은 매니아 낳아

기계만능의 산업사회에서의 인간소외를 풍자한 영화 ‘모던 타임스’를 만들었던 찰리 채플린이 들으면 아연한 말이겠지만, 현대인들은 아날로그 기계를 통해서 소외된 인간성의 회복을 시도하는 중이다.

최근 전세계적으로 일고 있는 구닥다리 수동 카메라 ‘로모(lomo)’열풍은 현대인의 이 같은 정서를 반영하는 대표적인 사례다.

냉전시절, 소련의 KGB(국가보안위원회) 연구소에서 첩보용으로 만들어 낸 이 35mm 기계식 구식 카메라가 지금에 와서 전세계 20만여 명의 자칭 ‘로모그래퍼(lomographer)’ 들을 만들어 내며 인기를 누리고 있는 것은 그리 이해 못 할 일도 아니다.

로모와, 로모로 찍은 사진들을 보면 금방 로모에 대한 세계인의 그 이상한 애정의 정체를 알 수 있다.

로모로 찍은 사진은 모서리 부분이 중앙보다 어둡고 중앙의 색상이 선명하게 부각되는 ‘터널효과’를 보여준다. 첩보용 카메라답게 어두운 곳에서 플래시 없이 찍은 사진도 나름의 분위기를 가지고 환하게 나온다. 최고의 광학기술을 자랑하던 러시아에서 개발돼 형광등 아래에서는 초록색, 백열등 아래에서는 노란색이 묻어나는 등 예술적인 색감을 가지고 있다.

이 때문에 로모로 찍은 사진은 어김없이 나름의 독특한 색감을 연출하는데, 정확하고 선명한 디지털 카메라와 달리 로모가 보여주는 이미지는 몽환적이고 따뜻하다. 사람들이 로모에 열광하는 것도 로모가 대상과 그 주변의 섬세한 감정과 분위기까지 담아 보여주기 때문이다.

게다가 로모는 주머니에 쏙 들어갈 만큼 작고 가벼워 로모그래퍼들은 늘 로모를 가지고 다니면서 자신의 일상을 따라 촬영하는 경우가 많다. 로모는 단순한 사진이 아니라 ‘생활’이라고 하는 그들의 개념도 이렇게 해서 나온다.

로모그래퍼들이 로모에 부여하는 새로운 의미들은 로모를 과거 첩보용 카메라로 처음 등장했을 때와 전혀 다른 새로운 무엇으로 만들어가고 있다.

기계가 주는 억압감을 연상시키지 않는 이 작은 카메라 하나가 디지털 시대의 한가운데에서 자유와 감성이라는 인간적인 요소들이 그 명맥을 유지하도록 돕고 있는 것이다.

자신과 자신의 일상의 흔적을 따뜻한 색감의 사진들로 남긴 로모그래퍼들은 다양한 동아리활동과 자신만의 인터넷 갤러리, 정기적인 전시회 등을 통해서 하나의 새로운 문화적 공동체로서 떠오르고 있다.

디지털 시대에서 아날로그의 향수를 느끼게 하는 것이 굳이 로모만은 아니다.

그러나 단순히 과거를 회상하는 상품이나 사물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가치관과 문화를 창조해 내고 있다는 데에 로모의 특징이 있다. 디지털 사회에서도 인간성이 차지할 여유를 남겨 둘 뿐만 아니라 디지털과 아날로그, 기계와 인간성이 조화된 새로운 문화적 가치관의 가능성을 제공하는 로모가 앞으로 또 어떤 모습으로 퍼져 나갈 지 궁금해진다.

2003.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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